잊히지 않는 장면들, 별거 아닌 순간 스쳐가는 시간 속에 유난히도 깊게 새겨진 기억들이 있다. 자꾸 떠오르는 장면, 소리, 맛, 향, 느낌은 내 기억 곳곳으로 침투한다. 그리고 그 언저리를 스치는 순간 팝업처럼 튀어나온다. 밤에 튀어나온 기억들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방금 설거지하다가 떠오른 한 장면에는 어느 점 집의 역술인과 그 앞에 두 손이 공손하게 모아놓은 나와 엄마 그리고 큰이모가 있다. 무릎을 꿇었는지 양반다리를 했는지 모르지만 운명의 제비뽑기를 건네는 어떤 신 앞에 앉은 사람들처럼 우리는 다소곳하고 경직되어 있었다. 마른침을 넘기는 소리가 세 번 이어진다. 꼴깍 꼴깍 꼴-깍 '음~평범하네''별일 없이 평범하게 살다 가겠네~' 똑똑한 막내와 혼자 자기 살길 잘 찾아간 동생의 점을 보고 난 후, 나의 생시를 열심히 분석하셨다. 그리고 나온 첫 마디. '흠, 큰딸 사주는 그래... 별일 없이 무난하다. 응응 그래.' 좋은 말인 거 아는데 가슴속에 청개구리가 '팔-짝' 튀어 올라 기척을 냈다. 머릿속으로 당시의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들이 내 앞 날 전체에 오버랩 되었다. 평생 이럴 거라고? 이렇게 재미없게 살 거라고? 내가? 싫다!그래서 나는 영국으로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서른을 앞둔 그때, 주변 사람들 모두 결혼하고 연애하던 그때, 회사에서 승진하는 지인 소식이 많이 들리던 그때. 그래서 아무 계획 없이 회사도 때려치우고 영국행 비행기를 발권했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올 지루한 날들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이 땅에서 도망쳐 버렸던 게 다 이 역술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려고 하던 일도 누가 '해!'라고 하면 '싫어!'가 먼저 튀어나오는 내 안의 청개구리가 내 삶의 끝까지 살아있으면 좋겠다. 고민되는 순간에 미련 없이 도망쳐버릴 수 있도록... 설거지를 다 마치고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투닥거린다. 그 2년의 영국 생활 동안 한국에서 포기한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신기한 것들을 배워왔다. 아마 누가 나에게 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을 이야기하라면, 나는 그 2년 동안의 일 들 사이에서 뒤적거릴 것이다. 평범한 인생의 흙길 위에 사방이 꽃으로 만발해있던 시간들을 와인 한 잔과 함께, 아니 세 잔과 함께 글로 기록해본다. (어휴,밤이라서 감수성이 폭발한다.) 2020.02.27